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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해외괴담/해외범죄

(연쇄살인범) 달밤의 미친 성도착증 살인마, 소아성애자 알버트 피시

by 세모세모뚱이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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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은 혐오스럽고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읽으시기 전에 주의를 요합니다.
 

이름: 알버트 피시
국적: 미국
출생: 1870. 5. 19.
사망: 1936. 1. 16.(사형집행, 전기의자형)
피해자: 공식 3명
범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살인 등
별명: 회색 사나이, 위스테리아의 늑대인간, 브루클린의 흡혈귀, 달밤의 미친놈, 부기맨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알버트 피시는 미국의 연쇄살인범, 강간범, 아동학대범이자 식인범입니다.
알버트는 최소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세명의 아동살해를 저질렀습니다.
(알버트의 짓거리로 보이는 피해자는 실제로 더 많습니다.)
동시에 최소 10건의 살인 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알버트가 저지른 악랄한 범죄는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알버트는 악랄한 범죄는 1924년 12월 13일에 체포되며 끝났습니다.
죄목은 그레이스 버드에 대한 유괴와 살인이었죠.
알버트는 1936년 1월 16일, 65세의 나이로 전기의자형으로 사망했습니다.
사망하기까지의 알버트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생 초기
알버트는 워싱턴 D.C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해밀튼 하워드 피시였습니다.
알버트는 1870년 5월 19일 생으로 란달 피시와 엘렌 프랜시스 하웰의 아들입니다.
부계는 영국인을 조상으로 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조상을 두었구요.
알버트의 아버지는 아내보다 무려 43살이나 많았습니다.
알버트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무려 75살이었죠.
알버트는 막내 아들이었는데 세명의 형제를 두었습니다.
월터, 애니, 에드윈이었습니다.
알버트는 본명은 아니나, 알버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싶어했습니다.
알버트라는 이름은 죽은 형제의 이름이었는데, 알버트의 별명이 "햄 앤 에그"였거든요..;;
이건 고아원에서 불리던 별명입니다.
알버트의 집안은 정신병력이 있습니다.
삼촌은 조증이 있었고, 형제 중 한 명은 정신병원에 감금되었으며, 이복형은 간질에 시달렸습니다.
누나인 애니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죠.
다른 세 명의 친척들도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알버트의 아머니는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습니다.

알버트의 아버지는 비료생산업자이자 선장이었습니다.
1975년 10월 16일 볼티모어 앤 포토맥 레일로드 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때 알버트의 엄마는 워싱턴이 있는 세인트 존스 고아원에 알버트를 보냈습니다.
고아원이 열악했는지 알버트는 고아원에서 학대를 받게 됩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에 굉장한 트라우마로 남게 되겠지만, 알버트는 이걸 다르게 받아들였나 봅니다.
알버트에게는 이 고통이 기쁨이었습니다.
두들겨 맞는데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1880년이 되어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알버트의 엄마는 공공근로 일자리를 얻고 알버트를 고아원에서 빼옵니다.
1882년 알버트가 12살이 되었습니다.
알버트는 한 전보 소년과 친해지게 됩니다.
이 녀석은 친구에게 참 좋은 걸 알려줍니다.
알버트에게 오줌과 똥을 먹는 데서 오늘 즐거움을 알려주었습니다.
알버트는 대중목욕탕을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알버트는 거기에서 다른 벌거벗은 다른 남자애들을 지켜볼 수 있었죠.
기분이 좋았습니다.
주말의 대부분을 거기서 그러고 보냈습니다.
또 심심할 때마다 신문에서 알아내거나 결혼정보회사 등을 통해 알게된 여자들의 신상 정보를 토대로 음란편지를 보냅니다.

1890-1918년 청년기 그리고 범죄
1890년 알버트는 스무살이 되었고 뉴욕으로 이사를 갑니다.
알버트는 뉴욕에서 남창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년들을 강간하고 성폭행하기 시작했죠.
가장 어린 소년은 6살도 안 됐을 겁니다.
1898년 알버트의 엄마는 안나 마리 호프먼과 결혼 주선을 합니다.
안나는 알버트보다 9살이 어렸습니다.
둘 사이에는 6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알버트, 안나, 거트루드, 유진, 존, 그리고 헨리였죠.
1903년 알버트는 중 절도죄로 체포되어 싱싱(이름이 Sing Sing입니다..)이라는 감방에 감금됩니다.
나중에 알버트는 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경험이라는 것은 섹스파트너였던 한 남자가 밀랍박물관에 자기를 데려간 일이었습니다.
박물관에 가서 무슨 감명을 받았나 했는데, 마침 거기에 반으로 두동강난 절단된 남자 거시기 있던 모양입니다.
보통 사람이면 징그럽고 혐오스러웠겠지만 알버트는 그걸 봤더니 아랫도리가 불끈해지는 경험을 했나봅니다.
그후 알버트는 거시기 절단 페티시에 빠지게 됩니다.

1910년이 되었습니다.
몇년이 지났습니다.
알버트는 델라웨어의 윌밍턴에서 일했습니다.
알버트는 거기에서 19살의 토마스 베덴이라는 소년을 만났습니다.
흥분 알버트는 토마스를 가만히 냅두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BDSM 놀이를 한 것이죠.
알버트가 강제로 이짓을 한 건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했습니다만 토마스는 지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열흘 후, 알버트는 토마스를 농장으로 데려가서 2주 넘게 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토마스를 묶어서 토마스의 음경을 두동강을 내버렸죠..
 
"그때 토마스가 질러댔던 비명과 그 처참한 몰골은 영원히 못 잊을 거예요.."
알버트는 황홀한 표정으로 토마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알버트는 미친 놈이었죠.
알버트는 원래 토마스를 죽인 다음에 시신을 토막내서 집에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더워서 시체가 썩으면 자기한테 어그로가 끌릴 것이 분명했기에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에 시체의 상처에 과산화수소를 붓고 바세린을 바른 손수건으로 감쌌습니다.
그리고 베덴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10달러 짜리 지폐를 시체 두고 떠났죠.

"저는 첫차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토마스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알려고도 안 했습니다."

1917년 1월에 알버트의 부인은 알버트를 떠나서 하인인 존 스트러브와 눈이 맞아서 도망쳤습니다.
알버트는 혼자서 애들을 키워야 했죠.
알버트는 한 때 신문사에 부인이 자기를 떠날 때 재산을 갖고 튀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충격 때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알버트는 환청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 알버트는 카페트에 몸을 칭칭 감고는 성경 속 요한의 지시라며 개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알버트는 아이들에게도 잔혹했지만, 본인에게도 잔혹했습니다.
그때 알버트는 사타구니나 배에 바늘을 꽂아 넣는 자해를 하며 기쁨을 느꼈습니다.
체포된 후 확인한 X-Ray를 통해 보니 알버트의 골반쪽에 최소 29개 정도나 되는 바늘이 꽂혀있었습니다.

알버트의 X-Ray 골반 사진


때로는 못이 박힌 주걱으로 자기 자신을 때리는 마조히즘을 즐겼죠.

못 박힌 주걱(nail-studded paddle)

라이터 기름을 적신 솜 뭉치를 똥구멍에 집어넣고 불을 붙이는 기행을 하며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쁜지 자기 아이들을 때리진 않았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기쁨을 달라고 하였죠.
자기 엉덩이를 못박힌 주걱으로 때리라고 시켰습니다.

1919-1930 확대
1919년, 알버트는 조지타운에서 고의적으로 장애가 있는 소년을 칼로 찌르는 상해를 입힙니다.
그랬습니다.
알버트는 주로 지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희생양으로 골랐습니다.
나중에 말하기를 이런 애들은 죽어도 그리워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개같은 논리죠..
알버트는 가끔씩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대가로 다른 애들을 유인하기도 했습니다.
알버트는 고문하고 사지를 토막내고, 끝내는 어린 아이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른바 지옥의 도구들을 가지고 말이죠.
지옥의 도구들은 도축용 식칼들과 톱이었습니다.
1924년 7월 11일, 알버트는 8살 먹은 베이트리스 키엘이라는 아이가 농장에서 뉴욕 스태튼 섬의 농장에서 엄마, 아빠와 떨어져 혼자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소녀에게 혹한 알버트는 돈을 줄테니 루바브(식용 풀)를 찾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합니다.
아직 어렸던 소녀 베아트리스는 농장을 떠나 그것이 악마의 손길인 줄 모르고 알버트를 따라갑니다.
이미 베아트리스 엄마가 딸을 찾을 때 이미 딸은 없었습니다.
근데 무슨 영문인지 알버트는 농장을 떠났다가 베아트리스네 부모님이 가꾸는 농장 곳간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알버트는 곤한지 잠을 청했죠.
피곤했나 봅니다.
이를 본 키엘의 아버지는 당장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소녀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1924년, 54살 먹은 알버트는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고문하고 성기를 자르라고 신이 계시를 내린 것 같았습니다.

알버트는 지옥의 도구들을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대상은 10살 먹은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알버트가 성추행을 했던 적이 있는 아이로 시릴 퀸이라는 아이였습니다.
시릴은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버트가 물어봅니다.

"얘들아. 잘 놀고 있구나. 너희들 밥은 먹고 노는 거니?"

"아니요.. 저희 점심 안 먹었는데.."

"그렇구나. 내가 샌드위치가 좀 있는데 우리 집에 와서 좀 먹는 것이 어떻겠니?"

마침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알버트를 따라갑니다.
알버트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레슬링 경기를 펼치고 있었죠.
매트리스 위에서 서로를 조르고 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의 싸움놀이가 너무 과격했는지 알버트의 침대 매트리스가 밀리면서 그 밑에 감춰두었던 식칼과, 도축용 칼, 톱이 발견됩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도망쳐버렸습니다.
지옥의 도구 실험 시도는 이렇게 실패합니다.

알버트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이지만(알버트의 전 부인은 이혼하지 않고 도망만 친 모양입니다.) 에스텔라 윌콕스라는 여성과 1930년 2월 6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이런 정신나간 인간과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습니까.
일주일만에 이혼합니다.
알버트는 여전히 신문 구인구직 광고에서 알아낸 여자들에게 야설을 적어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꼬리가 잡혀서 1930년 5월에 체포됩니다.
1931년, 알버트는 조사를 위해 벨뷰 병원으로 보내집니다.

그레이스 버드 살인사건
1928년 5월 25일.
알버트는 위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 신문을 통해 알게된 여성들에게 야설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또 야설편지를 보낼 대상을 물색하던 중 뉴욕월드라는 신문에서 한 광고를 보게 됩니다.

'18살의 에드워드 버드라는 젊은 남자입니다. 직업을 구하고 싶습니다.'라는 광고였죠.

같은 해 5월 28일 알버트는 신문에 적힌 에드워드의 집 주소를 토대로 그 집에 방문합니다.
에드워드의 집은 맨하탄에 있었죠.
알버트는 에드워드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사기를 쳤습니다.
훗날 알버트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알버트를 에드워드를 장난감으로 생각했습니다.
에드워드를 묶어서 그를 토막내고 과다출혈로 죽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죠.
알버트는 에드워드에게 자신을 "프랭크 하워드"라고 거짓으로 소개하였습니다.
뉴욕 파밍데일에서 농사를 하고 있는 농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알버트는 에드워드에게 자기 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며칠 내로 찾아오겠다고 떠났죠.
알버트는 약속을 지키진 못 했고, 에드워드 가족에게 전보를 붙여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나중에 꼭 찾아뵙겠다고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알버트는 에드워드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알버트는 그때 예상치 못한 보물을 보게 됩니다.

그레이스 버드

그건 에드워드의 여동생인 10살의 그레이스 버드였습니다.
이 정신나간 사이코는 아이를 보자 성욕이 폭발합니다.
어떻게든 그레이스를 자기 수중에 넣기 위해 그럴 듯한 구라를 만들어냈죠.
조카의 생일 파티에 그레이스를 초대하고 싶다구요.

실종 당시 그레이스 버드의 모습

 
알버트는 에드워드의 엄마, 아빠에게 말합니다.
저녁에 조카를 위한 파티를 열 건데 그레이스를 초대할 수 있게 해달라구요.
네 파티는 파티죠.
피의 파티....
파티장소는 폐가였습니다.
예전에 알버트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 사용됐던 악명높은 곳이었죠.
알버트는 거기에서 그레이스를 줄로 묶고 목을 자르고, 시신을 토막냈습니다.
그리고 먹었죠..
경찰은 처음에 용의자로 66살 먹은 찰스 에드워드 포프라는 남성을 1930년 9월 5일 체포했습니다.
그레이스의 실종의 유력용의자로서요.
이때까지는 아직 그레이스의 살인이 아닌 실종에 대해서만이었습니다.
그건 찰스의 별거 중인 부인이 남편을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무고였고, 찰스는 108일을 감방에서 보냈다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그레이스 버드 어머니에게 온 편지


1934년 11월 익명의 편지가 그레이스의 부모님에게 옵니다.
이 편지는 경찰로 하여금 알버트를 의심하게 만들었죠.
그레이스의 엄마는 글자를 몰라서 혼자서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아들에게 읽어달라고 합니다.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편지의 내용이 다소 충격적일 수 있기 때문에, 주의바랍니다.

버드 부인 안녕하신가요?
1894년 내 친구 중 하나가 갑판원인데 존 데이비스가 선장인 증기선 타코마호에 올랐습니다.
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콩으로 가는 배였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 친구와 다른 두 동료들은 배에서 내려서 술을 마셨죠.
그들이 돌아왔을 때 배는 이미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때 중국에는 기근이 심했다고 하더군요.
종류 상관없이 고기면 파운드 당 1달러에서 3달러까지 쳐주었다고 합니다.
없는 자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 컸기에 12살도 안 된 아이들이 식육업자들에게 팔려나서 도축되고 먹을 거리로 팔려나갔습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요.
14살이 채 되지 않는 아이들은 남자애들이나 여자애들이나 할 것 없이 거리에서 조심해야 했어요.
어느 가게에서든 스테이크용으로, 때로는 찹스테이크용으로 아니면 스튜용 고기로 취급되었어요.
벌거벗은 소년, 소녀의 몸뚱아리가 꺼내져와서는 손님이 원하는대로 토막났습니다.
시체들.. 그 시체안에는 정말 달콤한 부분이 있었죠.
그부분은 송아지 고기 커틀렛 만큼 가격을 받았어요.
존은 거기에서 꽤 오래 머물면서 사람 고기의 맛을 알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왔을 땐 각각 7살, 11살 먹은 두 소년을 납치했죠.
존은 둘이 벌거벗긴 후에 벽장 안에 묶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둘의 소지품은 다 태워버렸어요.
밤낮으로 두 소년은 존에게 엉덩이를 맞아야 했습니다.
고문도 당해야했어요.
그래야 고기가 더 맛있어지거든요.
어느날 존은 11살 먹은 녀석을 죽여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녀석의 엉덩이가 너무 토실토실해서 붙어있는 고기가 제일 많았거든요.
몸뚱이 모든 부위가 조리가 되었습니다.
머리, 뼈, 내장은 뺐어요.
소년은 오븐에서 구워졌어요.
특히 엉덩이는 끓여먹고, 조려먹고, 튀겨먹고, 스튜로도 만들어 먹었습니다.
7살짜리 꼬마애는 다음이었습니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처리되었죠.
그 당시 저는 바로 옆에 살고 있었는데요.
존은 저에게 자주 인육의 맛을 알려주면서 먹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928년 6월 3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치즈와 딸기를 선물로 가져갔죠.
우리는 점심을 먹었죠.
그레이스는 제 무릎에 앉아서 저한테 뽀뽀를 해줬어요.
그때 저는 그레이스를 먹기로 마음먹었어요.
파티에 초대하는 척을 해서 말이에요.
다행히 당신은 저한테 그레이스를 파티에 데려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습니다.
저는 웨스트체스터에 있는 빈 집으로 그레이스를 데려갔습니다.
제가 사전에 골라놓은 곳이었죠.
그곳에 가서 저는 그레이스에게 밖에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레이스를 꽃을 꺾고 있었죠.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옷을 다 벗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안 하면 옷이 피로 다 젖잖아요.
준비가 끝나고 나서 저는 창가로 가서 그레이스를 불렀어요.
그리고 벽장에 숨었죠.
그레이스가 방에 올 때까지요.
그레이스는 제가 벌거벗은 것을 보더니 울더라구요.
그러면서 아래층으로 도망치려고 했어요.
저는 그레이스를 잡았어요.
그레이스는 저에게 엄마한테 이를 거라고 했어요.
저는 일단 그레이스를 벗겼어요.
얼마나 발로 차고 깨물고 할퀴어대던지...
저는 그레이스를 목졸라 죽여버리고 작게 토막냈어요.
그래야지 내방까지 옮겨서 요리해서 먹을 수 있잖아요..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럽던지..
오븐 속에서 구워진 그 작은 엉덩이가 말이죠.
그레이스를 다 먹는 데에 9일이나 걸렸어요.
저는 그레이스를 따먹고 싶었지만.. 그러진 않았어요.
따님은 처녀로서 죽었습니다.
 
이 정신나간 편지를 본 경찰은 지체하지 않고 당장 편지를 조사했습니다.
데이비스 선장이야기와 홍콩의 기근 얘기는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다만 편지에서 그레이스 살인에 관련된 내용은 적힌대로 였습니다.
납치되고 그 뒤에 일어난 일들...
이미 그레이스는 없었기에 알버트가 정말로 그레이스를 먹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체포

 
편지는 어떤 봉투에 적혀져 온 것이었는데...
N.Y.P.C.B.A.라고 두문자로 적혀있었습니다.
뜻은 뉴욕 개인 기사 복지 협회(New York Private Chauffeur's Benevolent Association)라고 말이죠.
이것이 단서가 되었습니다.
경찰은 수사에 들어갔죠.
회사 관계자는 본인이 회사 문구용품 몇개를 집어들어서 이스트52번길 200에 있는 자취방으로 가져가서 이사 나올 때 두고온 적이 있다고 실토했습니다.
집주인에게 내막을 들어보니 그 회사 관계자가 쓰던 방을 쓴 게 알버트였고, 이 인간이 며칠 전에 방을 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집주인의 말은 이랬습니다.
알버트는 돈이 궁한 모양이었습니다.
알버트의 아들이 알버트에게 돈을 주었으니까, 다음에 방이 비면 그 방 좀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형사 수사관인 윌리엄 킹은 알버트가 곧 여기로 올 것을 알고 집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알버트를 잡았죠.
알버트는 순순히 윌리엄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본부에 동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경찰에게 면도날을 휘둘렀죠.
그래봤자 경찰을 당할 순 없었습니다.
윌리엄은 알버트에게서 면도날을 빼앗고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본인도 감추기에는 너무 크다고 느꼈는지 그레이스 버드 살인 혐의에 대해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원래는 오빠인 에드워드를 죽이려고 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여자 애를 강간하려고 집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지만, 알버트가 후에 고백한 내용에 따르면, 그레이스의 가슴팍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그레이스의 목을 조르고 두번 자위를 해서 사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내용은 재판에서 성욕 해소를 위한 유괴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신 식인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추가로 발견된 범행
프란시스 맥오도넬
1924년 7월 14일 야간에 9살된 프란시스 오도넬이 소년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프란시스는 스테튼 섬의 포트 리치먼드에서 친구들과 캐치볼을 한 것이 마지막 행적이었습니다.
그 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죠.
수사가 시작되었고, 머지 않아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체는 나무에 걸려있었죠.
발견된 장소는 집 주변에 있는 숲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성폭행 당한 후에 입고 있던 멜빵에 목이 줄려 죽었습니다.
부검 결과, 프란시스는 다리와 복부에 광범위한 자상이 발견되었고, 왼쪽 힘줄은 살점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알버트는 "혐의 없음"을 주장했죠.
결국 실토했는데, 프란시스를 거세하려다가 누가 오는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고 밝혔습니다.
프란시스의 친구들은 경찰에게 회색 수염을 가진 늙은 남자가 프란시스를 데려갔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웃들도 경찰에게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프란시스와 같이 있는 걸 보았다고 했죠.

프린시스의 엄마인 안나는 이전에도 똑같은 남자를 보았다고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혼자 궁시렁 거리면서 손으로 이상한 동작을 했며 거리를 배회하더군요. 회색 머리에 늘어진 회색 수염이 있었죠. 확실한 건 빛이 바래져 회색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훗날 이 회색 사나이는 알버트의 별명이 됩니다.
프란시스 맥오도넬 살인사건은 그레이스 버드 살인 사건이 풀릴 때까지 미제였습니다.
여러 목격 건이 있었습니다.
그 중 스테튼 섬의 농부인 한스 케일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는데, 포트 리치먼드 주변에서 프란시스의 실종 당일 목격된 이상한 남자가 알버트 같다고 했습니다.
리치먼드의 검사인 토마스 왈시는 알버트를 프란시스 살해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계속해서 혐의를 부인하였으나, 그레이스 버드의 살인사건 재판이 종결된 후 빌리 가프니를 살해한 것과 프란시스를 강간하고 살해한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프란시스 살인사건에 대한 얘기가 전국에 퍼지고 뉴욕의 타블로이드 신문인 뉴욕 데일리 미러에서는 알버트를 역사상 가장 악랄한 아동살인마로 적었습니다.

빌리 가프니
1927년 2월 11일 3살 먹은 빌리 비튼과 그의 12살 먹은 형은 브루클린에 있는 아파트 복도에서 4살 먹은 윌리엄 빌리 가프니와 놀고 있었습니다.
비튼의 형은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두 꼬마 아이들도 사라졌습니다.
빌리 비튼은 나중에 아파트 옥상에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가프니는 행방이 불명했죠.
나중에 가프니에게는 무슨일이 생겼는지 비튼에게 물어봤습니다.
비튼의 말은

"부기맨(귀신)이 잡아갔어요!"

라고 하였습니다.
가프니는 시체도 발견되지 않고,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처음에는 연쇄살인마였던 피트 쿠지노브스키가 용의선상에 올랐습니다.
그때 브루클린 전차의 기관사였던 조셉 미한이 신문에 보도된 알버트의 그림을 보고는 가프니 실종 당일에 가프니와 같이 전차를 탔던 남자로 지목했습니다.
알버트로 추정되는 남자는 가프니를 달래려고 했죠.
남자 아이는 겉옷도 입지 않고 엄마를 찾아 울었습니다.
끝내 남자에게 끌려서 전차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비튼이 말한 부기맨의 인상착의도 알버트와 일치했습니다.
경찰은 조셉이 봤다던 그 남자아이를 가프니로 확신했습니다.

맨하튼 실종국 형사들은 알버트가 주택 도색업자로 브루클린 부동산 회사에 1927년에 고용됐단 사실을 알아냈고, 가프니가 실종된 날, 납치된 지역과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아냈죠.
가프니의 엄마인 엘리자베스는 싱싱 감방에 수감 중인 알버트를 만나러 갔습니다.
알버트를 최초로 체포했던 윌리엄 킹 형사와 동반해서 갔죠.
엘리자베스는 아들의 실종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알버트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훗날 알버트는 그의 변호사를 통해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저는 가프니를 라이커 가의 쓰레기 더미로 데려왔습니다.
거기에는 집이 있었어요.
제가 가프니를 찾은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죠.
저는 거기로 가프니를 데려갔어요.
가프니를 발가벗기고 손과 발을 묶고 입에는 쓰레기 속에서 찾은 천 조각 하나를 물렸어요.
그리고 옷은 태워버렸습니다.
가프니의 신발은 쓰레기 더미로 던져버렸어요.
새벽 2시 쯤에 전차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2시 쯤일 겁니다.
저는 도구들을 챙겼습니다.
무게가 꽤 나가는 채찍(막대기에 여러갈래 채찍이 달린 것)을 챙겼습니다.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손잡이는 짧았죠.
혁대를 반으로 가르고 이걸 또 여섯 줄로 나눴죠.
8인치 길이였습니다.
저는 이걸 갖고 가프니의 엉덩이를 피가 흐를 때까지 후려쳤습니다.
귀와 코를 잘랐습니다.
귀에서 시작해 입을 지나 반대쪽 귀까지 찢었습니다.
눈알을 파냈습니다.
보니까 죽었더군요.
저는 가프니의 배에 칼을 꽂고 입을 갖다 댄 후에 나오는 피를 빨아 마셨습니다.
저는 감자 포대 4자루를 가져와서 돌을 모았죠.
그리고 가프니를 토막냈습니다.
가방에 넣었죠.
코, 귀, 배 조각 몇개를 가방 안에 넣었어요.
그리고 몸뚱이를 배꼽아래로 토막냈어요.
2개의 다리와 엉덩이 아랫부분까지.
이것들을 종이와 같이해서 가방에 넣었습니다.
머리통도 잘랐어요.
발, 팔, 손, 무릎 아래로 자른 다리..
이것들은 포대에 돌과 같이 넣었습니다.
끝은 묶어서 질척이는 물 속에 던졌습니다.
이건 아마 노스 비치를 따라가다보면 볼 수 있을 거예요.
수심은 3에서 4피트 정도였습니다.
한번에 가라앉았어요.
저는 고기를 갖고 집으로 왔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몸의 앞부분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입니다.
가프니의 꼬추와 토실토실한 엉덩이는 오븐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귀, 코, 얼굴의 다른 부분들, 그리고 뱃살로는 스튜를 만들어 먹었어요.
저는 양파를 넣고, 당근도 썰어넣고, 무, 셀러리, 소금 후추도 넣었어요.
맛있었어요..
엉덩이를 한쪽씩 갈랐어요.
불알도 갈라서 씻었죠.
한쪽씩 갈라진 엉덩이 살 사이로 베이컨을 넣고 오븐에 넣었어요.
그리고 양파 4개를 골랐어요.
고기가 1/4쯤 익었을 때 물을 조금 부어서 그레이비 소스를 만들고 양파를 넣었죠.
그리고 나무숟가락으로 소스를 위에 끼얹었어요.
고기가 더 맛있어지고 육즙이 살아났어요.
2시간 정도 지났어요.
먹기 좋게 갈색으로 변하고 전반적으로 잘 익었어요.
칠면조 고기 맛은 이 엉덩이 고기 맛의 반도 못 따라가요.
나흘 동안 작은 조각까지 남김없이 먹었어요.
가프니의 불알은 땅콩처럼 달콤했어요.
하지만 꼬추는 입에는 넣었는데 씹을 수가 없었어요.
변기에다가 토했어요.

재판 그리고 처형
뉴욕 화이트 플레인스에서 1935년 3월 11일에 그레이스 버드 살인에 대한 알버트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프레데릭 P 클로즈가 판사였고,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주임검사인 엘버트 F 갤러거가 기소하였습니다.
알버트의 변호인사는 제임스 뎀프시로 전 검사였고, 한 때 픽스킬 카운티의 장이었습니다.
재판은 10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알버트는 자기가 미친놈이며, 신이 아이들을 죽이라고 시켰다는 개소리를 해댔습니다.
여러 정신과 전문의가 알버트를 진찰했고, 결과는 성적 페티시가 심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알버트는 가학성애자, 피학성애자, 채찍질성애자, 노출광, 관음증환자, 피커리즘(남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에 흥분함) 성애자, 식인페티시, 대변성애자, 소변성애자, 혈액성애자, 아동성애자, 시체성애자이자, 성기폐쇄(음문을 꿰매거나, 음경 포피를 꿰맴)등의 페티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변호사 제임스는 알버트에 대해 말하면서 정신병의 총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든 이렇게 비정상적인 성욕에 미친 인간은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변호인단의 주요 전문 증인은 프레드릭 워햄이었습니다.
프레드릭은 아동발달을 깊이 연구한 정신과전문의로 뉴욕 형사 법정에서 여러 차례 정신분석을 하였죠.
이틀동안 증언을 하면서 프레드릭은 알버트가 광신도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 집착이 심하다고 말했습니다.
프레드릭이 말하길 알버트에게 소년을 희생하는 것읔 자기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생각하는 걸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것이 잘못된 것이어서 신이 반대한다면, 천사가 하지 못하게 막았겠죠."라며 자기의 범죄를 합리화하였습니다.
알버트가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고 이 "희생"을 시도하였을 때는, 운전 중이어서 생각만으로 그친 걸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구직광고를 냈던 에드워드 버드가 첫 타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드를 실제로 보니까 소아성애취향인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너무 커서 그레이스로 타깃을 바꾸게 된 거죠.
그레이스는 여자였지만, 알버트는 그레이스를 소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레드릭은 알버트의 식인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알버트는 식인행위를 일종의 성찬식으로 여기는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변호사 제임스가 프레드릭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 질문은 15,000자 정도 길이의 것으로 알버트의 인생에 대한 상세한 질문이었습니다.
의사로서 알버트의 정신 상태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그의 인생에 비추어서 대답해달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프레드릭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알버트는 미쳤습니다."

검사 엘버트는 프레드릭에게 반대심문을 했습니다.
알버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죠.
프레드릭은 대답했습니다.
알버트는 알긴 아는데 그게 본인의 죄와 속죄, 그리고 종교에 근거한 잘못된 생각으로 왜곡되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결국 미쳤다는 소리로 원래의 주장을 이어갔습니다.
변호인단에서는 프레드릭의 주장에 근거를 더할 두 명의 정신과 전문의를 더 불렀습니다.
반론 증인 중 하나였던 메나스 그레고리는 벨뷰 병원 전 관리자였습니다.
벨뷰 병원은 1930년에 알버트가 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죠.
메나스는 알버트가 비정상일 뿐만 아니라 미친놈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대심문 중에 제임스는 대변성애, 소변성애, 소아성애가 제 정신인 사람과 정신 나간 사람 중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물어봤습니다.
메나스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적으로 아픈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대게 성 도착이라고 말하는데 겉으로는 완전히 멀쩡합니다. 알버트는 수백만명의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일부 저명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들도 이와 같은 성적도착을 가진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음 증인은 맨하탄 구치소 소위 "무덤"의 상주 외과의인 페리 리히텐슈타인이었습니다.
제임스는 외과의가 증언을 한다고 하자, 반대했습니다.
판사 프레데릭(정신과 의사와 이름이 비슷합니다;;)은 기각하였습니다.
감옥 의사는 충분한 권한이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페리는 알버트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어떤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페리는 "그것은 마조히즘 아니에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알버트는 그냥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 자체에 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 뿐입니다.
다음 증인 찰스 램버트는 대변기호증이 평범한 관습이며 종교적 식인 행위는 정신병일 수 있지만 취향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정신병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마지막 증인인 제임스 바바소르는 찰스의 주장을 반복하였습니다.
또다른 변호측 증인인 매리 니콜라스는 알버트의 17살 먹은 수양딸입니다.
매리는 알버트가 본인과 자기 형제 자매들에게 여러 게임을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그 게임이라는 것은 마조히즘으로 보였고 아동 성추행같은 것들을 포함했습니다.

결론이 났습니다.
배심원 그 누구도 알버트가 미쳤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배심원 한명이 말했습니다.
"알버트는 처형돼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배심원은 알버트가 제 정신이며 유죄라고 말하면서 변호인단에게 전기의자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알버트의 성적취향이 제 정신이 아니어서 생긴 문제인니 아니면 단순한 개인의 취향 존중의 영역인지 논란을 남기고 알버트는 사형장으로 끌려갔죠.
알버트는 1935년 3월 감방에 도착하여 1936년 1월 16일 싱싱 감방의 전기의자 위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알버트는 오후 11시 6분에 사형장으로 들어갔고 3분 뒤 사망했습니다.
시체는 싱싱 감옥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죠.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랬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죠.."

당시 목격한 사람 말에 따르면 알버트는 두번 떨꺽 거리더니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 루머가 돌았죠.
알버트가 자해할 때 본인 몸에 꽂아 넣었던 바늘들이 합선을 일으켰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건 그냥 거짓이었고 알버트는 다른 전기의자형을 받은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죽었다고 합니다.

알버트 처형 후 기자회견에서 알버트의 변호사 제임스는 알버트의 마지막 유언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내용은 수기로 적은 것으로 몇페이지 분량에 달하는데 알버트가 죽기전 몇시간 동안이나 펜으로 적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널리스트들은 이 내용을 공개하라고 압박을 넣었지만 제임스는..

"저는 이 내용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저속하고 추접스러운 것이니까요."라며 거부했습니다.
 
피해자
1924년에서 1928년 사이 알버트가 살해한 것이 확실한 피해자입니다.
1. 프란시스 맥도넬, 8세, 1924년 7월 15일, 뉴욕 롱 아일랜드
2. 빌리 가프니, 4세, 1927년 2월 11일, 뉴욕시
3. 그레이스 버드, 10세, 1928년 6월 3일, 뉴욕시
 
의심
알버트는 다른 사건에 대해서 자기는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최소 12건의 다른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용의자였습니다.
윌리엄 킹 형사는 알버트가 브루클린의 흡혈귀로 강간범이자 살인마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로 아이들과 십대들을 대상으로 뉴욕시에서 범죄를 저지른 살인마로 말입니다.
 
1. 예타 아브라뮈츠(?, 뭐라고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12세
1927년 5월 14일, 뉴욕의 행정구역인 브롱스 심슨길 1013에 있는 5층 짜리 아파트 옥상에서 목이 매달린 채 폭행당한 것으로 발견됐습니다.
예타는 발견되고 얼마가지 않아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제보에 따르면 예타가 사망한 날에 알버트와 굉장히 유사한 모습의 남자가 지역소녀들을 꾀어내려고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2. 매리 엘런 오코너, 16세
1932년 2월 15일, 퀸즈의 파 로커웨이에서 토막난 매리의 시신이 숲에서 발견됩니다.
이곳은 알버트가 건물 도색작업을 했던 곳이었습니다.
 
가능성
알버트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 100명의 소년을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대상은 위에도 언급했듯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죠.
알버트가 이들을 범죄대상으로 고른 이유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 같아서였습니다.
게다가 알버트는 자기가 살았던 23개의 주에서 한명씩 죽였다고 떠들었습니다.
 
1. 토마스 베든, 19세, 1910년 경
위에서 언급했던 발달장애 아이입니다. 알버트의 주장에만 의존한 인물이라서 확실치는 않은 듯 합니다.
2. 엠마 리차드슨, 5세, 1926년 10월 3일
3. 메일 알링, 4세, 1930년 7월 13일
4. 로빈 제인 리우, 6세, 1931년 5월 2일
5. 벤자민 콜링스, 17세, 1932년 12월 15일
 
알버트는 저지른 짓에 비해 비교적 편하게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죽고 말았습니다.
 
지옥에서 가서 그 죄를 씻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Albert Fish - Wikipedia

Albert Fish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merican serial killer, child rapist and cannibal (1870–1936) Hamilton Howard "Albert" Fish[1] (May 19, 1870 – January 16, 1936) was an American serial killer, rapist, child molester, and cannibal who committed at

en.wikipedia.org

* 본 내용은 위키백과를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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